본문 바로가기
철학

사는 데 의미가 꼭 있어야 할까? 인생의 의미와 허무주의에 대한 입문적 철학

by 로아벨 2025. 6. 15.

    [ 목차 ]

이 글에서는 그런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허무주의의 핵심 개념, 그리고 그 속에서도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차분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문득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질문은 단지 철학적인 사색에 머무르지 않고, 때때로 깊은 외로움이나 허무함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곤 합니다. 삶이 반복되고 고통이 쌓일수록, 우리가 걷는 길에 어떤 이유나 목적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사실 이 물음은 인간만이 던질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이며, 존재에 대한 자각과 불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답을 찾고자 고민해 왔고, 그중 일부는 삶에 본질적인 의미는 없다고 보는 허무주의라는 입장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허무주의는 삶이 결국 무의미하다는 관점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절망이나 무기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우리는 기존의 의미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며 살아갈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는 데 의미가 꼭 있어야 할까? 인생의 의미와 허무주의에 대한 입문적 철학
사는 데 의미가 꼭 있어야 할까? 인생의 의미와 허무주의에 대한 입문적 철학

1. 삶의 의미를 묻는 인간

인간은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도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생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사는가,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 존재의 독특함을 보여줍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사변적인 사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깊은 상실이나 외로움, 혹은 반복되는 일상 속의 공허함을 마주할 때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찾으려는 존재입니다. 이 의미에 대한 갈망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정체화하고, 나아가 살아갈 이유를 부여받으려는 근원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꺼내보았을 것입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러한 질문을 경계상황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경계상황이란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죽음, 고통, 죄책감, 운명 같은 피할 수 없는 조건을 마주하는 순간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때, 혹은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할 때, 우리는 그동안 외면해 왔던 근본적인 질문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도 인류는 이런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종교와 철학, 문학과 예술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선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삶의 목적을 이성적인 덕의 실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존재에 신성한 질서를 부여하며, 삶을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는 여정으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반면, 현대 철학은 절대적인 의미의 붕괴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구성해야 한다는 실존주의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알베르 카뮈는 인생은 부조리하지만, 우리는 그 부조리를 인식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며, 의미를 잃은 세계 속에서도 삶을 계속해나가는 인간의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이렇듯 삶의 의미는 어느 누구도 단번에 설명할 수 없고, 단일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 개인은 저마다의 환경과 경험, 세계관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거나, 혹은 찾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가족과 사랑에서, 누군가는 일과 성취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자연과 예술, 혹은 단순한 일상에서 의미를 발견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가 반드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삶의 의미는 각자의 감정과 선택, 삶의 맥락 속에서 형성되며, 그것은 누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 개인적인 진실입니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 항상 고귀하거나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그 질문은 인간을 혼란에 빠뜨리고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삶의 방향성을 정해주는 전통적 가치와 공동체의 힘이 약화되면서,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일 수 있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막막함과 두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고, 답을 찾고, 다시 의심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묻는 인간의 질문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그것은 단지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여정입니다. 삶은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여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미를 묻고, 스스로의 답을 만들어가며, 때때로 흔들리면서도 다시 자신을 다잡는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존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닌 가장 근본적이고 아름다운 능력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존재에 대해 성찰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무의미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질문은 때로는 무거운 철학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품고 살아가는 일상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삶의 의미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2. 허무주의는 삶을 부정하는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의 끝자락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주하게 되는 철학적 입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허무주의입니다. 허무주의는 간단히 말해, 인간의 삶이나 세계에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어차피 다 무의미하다는 냉소적인 태도에서부터, 모든 가치와 목적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다라는 철학적인 주장에 이르기까지, 허무주의는 때때로 위험하거나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허무주의는 삶 자체를 부정하고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상일까요?

허무주의는 종종 오해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허무주의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삶에 대한 냉담한 태도, 의욕 없는 무기력함,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이나 파괴로 이어지는 심리적 상태입니다. 실제로 철학사에서도 허무주의는 종종 불안과 혼란의 시대, 전통 가치가 무너지는 전환기의 산물로 등장했습니다. 니체는 이러한 시대를 가치의 붕괴라고 표현하며, 허무주의가 현대인의 영혼을 잠식하는 현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특히 기독교적 가치체계의 붕괴 이후, 사람들이 절대적인 의미를 상실하면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지요. 그러나 니체가 허무주의를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만 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허무주의를 통해 기존의 가치들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 즉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전환점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진 의미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 내는 존재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입니다. 그는 이러한 인간상을 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초인은 기존의 허위 가치들을 무너뜨리고, 스스로의 삶을 예술작품처럼 구성하는 존재입니다. 니체에게 허무주의는 파괴의 철학이 아니라 재창조의 철학이었습니다. 또한 허무주의는 반드시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보는 시각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알베르 카뮈는 대표적인 부조리 철학자로, 허무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의미를 갈구하지만, 세계는 아무런 의미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은 부조리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부조리를 인식한다고 해서 삶을 포기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부조리를 인식하고도 그에 굴복하지 않는 삶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 시지프 신화에서, 시지프는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지만 그 행위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보여줍니다. 카뮈는 말합니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고. 이처럼 허무주의는 오히려 인간이 자율적으로 의미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전통적인 종교나 이념, 사회적 역할이 무너지고 나면 우리는 공허함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유로워지기도 합니다.

허무주의는 그 자유의 기원입니다. 절대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어떤 특정한 목적에 맞춰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허무주의는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 대한 절대적인 강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철학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허무주의는 다루기 어려운 사유입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를 방황하게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깊은 우울이나 삶의 무력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삶을 부정하거나 해체하는 길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허무주의의 한가운데에서 진정으로 자율적이고 의식적인 삶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의미 없음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인 뒤에도 살아가겠다는 결심, 그 자체가 새로운 삶의 태도를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가치 체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허무주의는 더 이상 회피하거나 배척해야 할 사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거쳐야 할 성찰의 문턱일지도 모릅니다. 그 문턱을 지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안 지금,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구하지 않게 됩니다. 대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매일의 선택과 행동 속에서 작지만 유의미한 가치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허무주의를 통과한 인간의 또 다른 시작이며, 삶을 부정이 아닌 창조의 눈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입니다.

3. 의미는 스스로 만드는 것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결국 한 가지 진실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고정된 진리나 목적, 절대적인 기준이 어딘가에 존재하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종교, 철학, 과학, 이념 등에 기대어 정답을 찾으려 하죠.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전통이 무너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외부의 절대적 의미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삶에 정해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처음엔 공허하고 두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간 우리를 지탱해 주던 세계관이 무너지는 순간,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공허함은 곧 자유와 연결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 삶의 목적을 미리 정해놓았다면, 우리는 그 틀 안에서만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가 됩니다. 바로 그 점이 인간 존재의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신이 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본질보다 존재로 먼저 태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우리는 어떤 정해진 본질을 가진 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후에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사르트르에게 삶의 의미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성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이며, 그 자유는 곧 책임이다. 이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직접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어떤 것도 탓할 수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선택하고,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온전히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이는 벅차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존엄한 일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만의 철학을,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크고 거창한 의미만이 의미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의미라는 말을 들으면, 위대한 업적이나 역사에 남을 성취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일상의 작고 소박한 행위 속에서도 우리는 의미를 만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조각들입니다. 그러한 조각들이 쌓이고 연결되어 한 사람의 인생 서사를 만들어갑니다. 심리학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 창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긍정심리학자인 마틴 셀리그만은 인간의 삶에서 의미는 행복을 이루는 핵심 요소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닌,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헌신할 때 사람들이 더 깊은 만족과 충만감을 느낀다고 보았습니다. 의미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향을 제시해 주고, 고통의 순간에도 삶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됩니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는 참혹한 수용소 경험을 통해 인간이 극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살아갈 힘을 찾을 수 있는지를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프랭클에게 삶의 의미란 생존의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 자체가 인간 정신의 근본적인 작용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의미는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어떤 가치를 지지하며,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빛날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 속에서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 의미의 주체성 때문입니다.

결국 의미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맥락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무형의 질감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감정, 기억, 가치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삶의 의미는 단 하나의 정답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어가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때로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라도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허무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비로소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의미를 만들며 살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직 나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이 모여 결국 우리의 삶 전체를 의미 있게 만듭니다. 삶의 의미는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것이 스스로 만든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조금씩, 자신의 삶을 창조해 나갑니다. 의미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만드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